오월, 여름의 초입에서부터 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벌써부터 이렇게 더운데 한여름에 어떻게 사냐는 말이 입버릇처럼 새어나왔다.
출근길 만원 지하철에서 월급이 들어왔고 카드대금과 적금이 빠져나간 내역을 확인했다.
그러고보니 어느덧 두 달 뒤면 일년 동안 착실히 저축해온 적금을 찾을 수 있었다.
동시에 두 달 뒤면 휴학 1년 동안 머물렀던 회사를 떠나야했다.
지옥같은 만원 지하철도 곧 생경한 풍경이 될 것이라 생각하니 내심 서운했다.
오랜 고민 끝에 결정한 일년의 휴학은 내 20대를 뒤집어 엎었다.
요즘도 가끔 휴학을 하지 않았더라면, 운 좋게 회사 생활을 경험해보지 못했더라면, 열심히 벌어서 후회 없이 노는 경험을 해보지 못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어땠을까를 생각해본다.
아마 알맹이 없이 껍데기만 남은 바보가 되었겠지.
그렇기에 적금 통장의 400만 원은 내게 단순 액수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앞으로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 지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이 회사에 반드시 다시 돌아오겠다는 열망, 새롭게 맺은 인연들과 그들에게 얻은 인사이트가 적금 통장 안에 함께 담겨 있었다.
그런 돈을 결코 함부로 써버릴 수는 없었다.
가장 가치있게 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몇 번을 궁리해봐도 내가 내릴 수 있는 답은 여행 뿐이었다.
퇴사를 하고 한 달 뒤, 그렇게 나는 가장 친한 대학 동기와 2주 간의 여행 길에 올랐다.
스톡홀름 공항에서 IN - OUT 해서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순으로 도는 일정이었다.
오후 10시 35분 야간 비행기를 타고 이스탄불까지 12시간을 날아가 3시간 동안 대기했고, 이스탄불에서 스톡홀름까지는 3시간 30분이 걸렸다.
비행만 도합 15시간 30분을 했다.
우리는 출국과 귀국 모두 터키항공을 이용했다.
기내식이 정말 끔찍했다는 거 말고는 특별히 외국 항공이라서 불편했던 점은 없었다.
아시아나랑 같은 스타얼라이언스 항공사라서 문제가 생기면 아시아나 쪽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레그룸은 정말 상상 이상으로 좁았다.
보통의 우리나라 LCC 보다 좁거나 그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좌석 배열은 2-4-2였는데 우리는 두 명이 앉는 라인 맨 뒷좌석으로 예약했다.
그나마 자리 선정을 머리 좋게 잘 해서 망정이지, 네 명이 앉는 라인 중앙 어디쯤에 앉아서 가야 했더라면 정말 견디지 못했을 것 같다.
12시간을 날아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공항에 도착했다.
오전 4시 반이어서 온통 어두컴컴 했고 공항에는 노숙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환승 게이트를 찾아 걸어가는데 동양인이라고는 우리 둘 뿐이었다.
완전히 이방인이 된 기분이었다.
수면유도제가 뒤늦게 반응을 보이는지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게이트 근처 의자에서 한 시간 정도 졸다가 눈을 떴다.
해가 어스름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스톡홀름으로 가는 비행기로 갈아탄 후에는 완전히 정신을 잃어버렸다.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는데 비행기가 착륙하고 있었다.
처음 경험해 본 장거리 비행은 상상만큼 고통스럽지도, 그렇다고 결코 만만하지도 않았다.
뻐근한 허리를 부여잡고 이미그레이션을 하러 갔다.
어딘가 성이 나 보이는 입국심사관이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기껏 해야 입국 목적과 일행 정도 물어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집요하게 나를 파고 들었다.
심사관이 여권에 도장을 찍어주고 나서도 한동안 심장이 요동쳤다.
입국 절차를 무사히 마치고 드디어 스웨덴 땅을 밟았다.
우리는 우선 스톡홀름 중앙역으로 가기 위해 인포메이션 카운터로 가 공항버스 플뤼부사느라(Flybussarna)를 예매했다.
카운터 직원이 안내한 대로 2번 승차장을 찾아가서 버스를 탔다.
소가 풀밭을 뛰어다니는 시골길을 지나 도심으로 들어서니 사진에서만 보던 북유럽 건축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전거를 타고 버스 옆을 지나는 이곳의 사람들부터 신호등 하나까지 모든 풍경이 생경했다.
이 풍경 안에 담겨진 내가 어색할 지경이었다.
45분 정도를 달려 중앙역에 내렸다.
중앙역 지하에 캐리어를 맡기고 SJ 승강장 앞 자동판매기에서 오슬로로 가는 기차표를 미리 교환했다.
오슬로까지 가는 SJ 티켓은 195SEK, 한화로 25,000원 정도였다.
기차를 탈 때까지 세시간 정도 남은 상황이어서 우리는 먼저 밥을 먹기로 하고 역 밖으로 나갔다.
북유럽에서의 첫 끼니는 '옌센스뵈프후스(Jensen's Bøfhus)'의 런치 스테이크였다.
스톡홀름 중앙역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었는데 노르웨이와 덴마크에도 있는 체인점이었다.
주먹 만한 스테이크와 감자튀김 한 그릇, 그리고 소스 하나가 볼품 없이 나오는 스테이크는 150SEK, 한화로 약 19,000원 정도였다.
당시에는 너무 형편없다고 생각하며 먹었지만 후에 여행을 하면서 옌센스뵈프후스 정도면 얼마나 가격 대비 괜찮은 식당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삼만 원 이하의 돈으로는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없었고, 만 원 이하로 밥을 먹을 방법은 편의점 핫도그 뿐이었을 정도로 북유럽의 물가는 살인적이었기 때문이다!
밥을 먹고 나서는 중앙역을 중심으로 스톡홀름 시내를 한 바퀴 돌았다.
날이 흐렸지만 어쩐지 우중충한 날씨와 도시의 분위기가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지금 내가 스웨덴이라는 게 하나도 실감이 안 나."
우리가 밟고 서 있는 땅과 스웨덴에서 마주한 서로를 어색해하며 중앙역으로 돌아갔다.
스톡홀름 중앙역에서 오슬로 중앙역까지는 기차를 타고 5시간 30분이 걸렸다.
차창 밖으로는 시골 풍경이 보였다.
가끔 간이역에 정차할 때도 있었는데, 그게 가장 좋았다.
온전한 역이 아닌 어설픈 역과 그곳에 잠시 머물렀다 떠나는 기차의 모습이 마치 북유럽에 잠시 머무르게 된 우리 둘 같았다.
5시간 30분을 꼬박 달려 오슬로 중앙역에 도착했다.
시간은 어느덧 오후 10시였다.
오슬로 중앙역 근처에서 트램을 타고 숙소가 있는 Welhavens gate로 갔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트램에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한국에서부터 24시간, 드디어 오슬로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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