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그치기를 반복했다.
베르겐은 유달리 다른 도시들에 비해 날씨가 변덕스러운 편이었다.
헨리가 전날 알려준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베르겐 중앙역으로 갔다.
15분 정도 버스를 타고 언덕을 내려가니 어젯밤 헨리네 마당에서 내려다 보았던 시내가 나왔다.
베르겐 시내는 중앙역을 중심으로 명소들이 가까이에 다 모여 있어서 도보로 돌아다녀도 문제 없었다.
우리는 먼저 플뢰옌(Fløibanen)산 등산 열차를 타러 갔다.
플뢰옌산 정상까지 운행하는 케이블카인데 왕복권은 95NOK, 편도는 50NOK에 예매할 수 있었다.
우리는 올라갈 때만 열차를 타고 걸어서 내려갈 예정이었어서 편도권으로 예매했다.
입구부터 사람들로 북적였다.
놀이공원을 방불케 하는 인파에 티켓 발권하는 데만 20분, 발권 후에 탑승 대기라인까지 가는 데만 30분 정도가 걸렸다.
등산 열차로 정상까지는 올라가는 데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올라가는 동안 창밖으로 산과 바다를 볼 수 있었는데, 사람들 틈에 끼여있느라 주변의 풍경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얼른 내리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후에 정상에서 시내까지는 걸어서 내려갔는데, 1시간이 넘게 걸렸다.
걸어도 걸어도 지상이 보이지 않았다.
왕복 티켓을 끊었어야 했다고 후회하며 산길을 내려왔던 기억이 난다.
산 정산에 도착하고 일제히 어디론가 우루루 쫓아가는 사람들을 따라갔다.
열차 승하차장 인근에 전망대처럼 베르겐 전경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벌떼처럼 서 있는 사람들 틈으로 들어가 베르겐을 내려다 보았다.
전망대에서 반대편으로 걸어 내려가면 완연한 숲길이 펼쳐졌다.
산악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과 조깅하는 사람들이 우리 옆을 지나갔다.
숲 곳곳에는 트롤 조각상이 설치되어 있었고 마녀를 조심하라는 팻말도 붙어 있었다.
우리는 마치 톰 소여라도 된 것처럼 숲을 헤집고 다녔다.
쓰러진 나무를 통나무 다리를 삼아 건너보기도 했고, 길이 닦여 있지 않은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갔다가 진흙탕에 발이 빠지기도 했다.
운동화가 엉망이 되었지만 즐거우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발길 닫는 대로 산길을 걷다가 호수로 이어지는 길을 발견했다.
이정표를 따라 10분 정도 걸어 내려왔을까, 인적이 드물어질 때쯤 물이 찰방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수풀 속에 자그마한 호수가 자리하고 있었다.
모네의 그림 같았다.
카누를 타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진행요원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우리도 카누를 탈 수 있냐고 물어보니 무료로 빌려주고 있다고 했다.
주저할 거 없이 바로 타겠다고 말했다.
요새같은 창고에서 라이프재킷을 챙겨 입고 나오자 우리가 탈 카누가 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유유자적 플뢰옌산 호수 위를 떠다녔다.
노질이 서툴러 수풀에 들어가거나 뭍에 뱃머리를 들이박기도 했지만 그런 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언젠가 꼭 그림같은 호수에서 카누를 타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우연한 계기로 버킷리스트를 달성할 수 있을 지는 몰랐다.
물 위로 햇살이 부서져 반짝였다.
노로 반짝이는 수면을 휘저으면 물에 작은 파동이 일었다.
파동의 미약한 힘은 우리가 탄 카누를 앞으로 움직였다.
좀 더 오래 카누 위에 타 있고 싶었지만 카누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 한 바퀴만 돌고 얼른 뭍으로 돌아갔다.
창고에 라이프재킷을 가져다 두고 다른 사람들이 탄 카누가 뭍을 오고 가는 걸 지켜보았다.
산에서 한 시간 정도 걸어내려와 식당가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고 브뤼겐(Bryggen)으로 이동했다.
브뤼겐 지구는 아기자기한 집들이 항구를 따라 나란히 늘어서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베르겐의 랜드마크이기도 하다.
명성에 걸맞게 베르겐의 모든 기념품점에서는 브뤼겐 지구의 집들을 따라 만든 마그넷을 판매하고 있었다.
몇몇 집들은 보수공사 중이었는데, 지붕 위로 집 외관과 똑같이 디자인된 천을 덮어둔 모습이었다.
그래서 바다 건너에서 봤을 때는 공사를 했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
경관을 해치지 않으려는 세심함이 엿보였다.
그리고 우리는 저녁 거리를 사기 위해 베르겐 어시장(Bergen Fisketorget)으로 갔다.
베르겐 최대의 어시장이라고 해서 규모가 엄청 클 거라고 기대했는데, 일렬로 늘어선 노포 열댓 개가 전부였다.
대부분 연어나 새우를 팔고 있었고, 고래 육포나 말린 바다장어 같은 특이한 해산물을 파는 곳도 종종 볼 수 있었다.
천천히 둘러보고 싶었지만 여기저기서 가격표를 들이밀며 호객 행위를 하는 탓에 부담스러워서 얼른 시장을 빠져나와 버렸다.
가격이 저렴하면 어시장에서 먹을 걸 사서 숙소로 돌아갈 계획이었는데 가격이 너무 비쌌다.
인근 식당에서 먹고 가는 거랑 가격 차이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노르웨이의 항구도시까지 와서 해산물을 먹지 않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같은 값이면 편하게 먹고 가자는 생각으로 인근 해산물 식당에 가기로 했다.
랍스터 1/4마리, 새우 한 스쿱, 버터에 졸인 홍합 한 스쿱, 그리고 생연어 300g을 시켰는데 한화로 약 14만 원 정도를 내야 했다.
정말 터무니 없는 음식 값이었지만 어시장 가격과 비교하면 보통 수준이었다.
맛도 특별할 건 없었지만 연어의 본고장에서 해산물을 먹는 경험 비용이라 생각하며 식사를 마쳤다.
그날 밤 헨리의 집에서 노르웨이에서의 마지막 날을 갈무리 했다.
16시간을 날아 오슬로 공항에서 헤맸던 게 불과 어제 일 같은데, 조금 익숙해질 무렵 우리는 다시 낯설어질 준비를 해야 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헨리의 집에서 나와 베르겐 중앙역의 공원 어귀에서 시간을 보냈다.
베르겐의 극장에 들어가 노르웨이에서는 어떤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지 슬쩍 엿보기도 했고, 할머니의 미트볼이 맛있었던 가정식 식당에 다시 들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일찍이 베르겐 공항으로 이동했다.
베르겐 공항 정문에 'BERGEN?'이라 적힌 현판이 붙어 있었다.
마치 내게 노르웨이가 어떤 의미로 남았는지 물어보는 것 같았다.
이제 덴마크로 떠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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