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때는 입시 준비에 바빠서, 대학에 오니 이곳 생활도 그렇게 만만한 건 아니라서 단 한 번도 제대로 놀아보지 못하고 스물 둘이 되었다.
열심히 사는 거에만 급급해서 여행에 대한 갈증같은 것도 없었다.
빨리 졸업하고 취업해서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야 한다는 압박에 꽤나 오래 시달렸던 것 같다.
휴학도 계획에 없었으나 이대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휴학을 하게 되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1년 정도 쉬고 싶다거나, 여행을 가겠다거나 하는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휴학과 동시에 회사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매 월 꽤 많은 돈이 손에 쥐어졌다.
생활비를 제하고도 여유금이 조금 남아서 적금을 들면 쏠쏠할 정도였다.
성인이 되고서 처음으로 '여행이라도 가볼까'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여행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쉽게 어디를 가겠다고 결정하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마침 친한 학교 선배가 국내라도 짧게 다녀올 생각이 있냐고 물어왔다.
"강릉 갈래요?"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말로만 듣던 겨울바다가 문득 궁금해졌는데, 동해안이 아무래도 예쁠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깊게 생각할 것 없이 강릉으로 떠났다.
금요일, 신규 드라마 제작발표회가 있던 날이었다.
회사에 반차를 내고서 제작발표회가 끝나자 마자 부랴부랴 동서울터미널로 이동해 나를 기다리고 있던 선배를 만났다.
터미널에서 몇 시간 정도 시간을 때우다가 5시 발 버스를 타고 강릉으로 출발했다.
성수기에다가 금요일 오후에 출발한 거라 차 안은 만석이었다.
아마 평일이나 비수기에 간다면 좌석이 여유로운 편일 것이다.
당시는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KTX가 개통되기 이전이어서 지금보다 버스 이용객들이 더 많았던 것도 있다.
2시간 30분 남짓 달려 강릉에 도착하자 이미 해는 저문지 오래였다.
도착한 첫 날은 특별한 거 할 것 없이 곧장 숙소로 이동해 술을 한 잔 하기로 했다.
중앙시장으로 가 각자가 먹고 싶은 걸 하나씩 골랐다.
그 결과 이렇게 거나한 한 상이 차려졌다.
엄지네 꼬막, 육사시미, 우럭 회와 오징어 회, 베니 닭강정.
나름 강릉에서 유명하다는 음식들만 골라 담아왔다.
날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강릉까지 와서 닭강정을 먹냐는 핀잔을 들어가면서도 닭강정만 꿋꿋하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강릉 중앙시장 지하에는 수산물 시장이 따로 있었는데, 9시가 다 되어가서 그런지 절반 정도는 문이 닫혀있었다.
호객 행위를 하는 여러 점포를 지나 한산해 보이는 어느 할머니의 가게를 선택했다.
할머니는 오른쪽 반신이 불편한지 걷는 것도, 생선을 잡아다 회를 뜨는 것도 어려워 보였다.
장정들이 운영하는 다른 가게에 비해 회를 뜨는 데 시간이 두세 배는 족히 더 걸렸던 것 같다.
그래서 다른 가게에 비해 한산했던 걸까.
하지만 우리는 아무렴 상관없었다.
급할 것도 없었고 서울로 이사 간 아들 내외 이야기를 해주시는 할머니와의 대화가 즐거웠다.
젊은 애들끼리 놀러다닌다는 게 부럽다는 듯 말씀하시는 할머니가 사뭇 측은하기도 했다.
그렇게 7-8만 원은 족히 드렸어야 할 것 같은 양을 절반 값에 받아들고서 숙소로 향했다.
숙소까지는 택시를 타고 이동했는데, 중앙시장에서 출발해 8000원 정도 나왔다.
숙소와 관련된 정보는 다음 글에서 이어가도록 하겠다.
강릉 안에서는 따로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았고 택시를 타고 다녔다.
택시로 강릉 시내 대부분을 기본 요금에서 4000원 선에 이동할 수 있어서 대중교통을 타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카카오 택시도 요청하는 대로 잘 잡히고, 단거리라고 해서 승차거부를 하는 일도 없으니 렌트가 어렵다면 택시를 이용하는 걸 추천한다.
택시 기사님들 역시 단 한 분도 빠짐없이 친절하셨다.
강릉에서 나고 자란 분들도 있었고, 타지에서 강릉으로 와 정착한 분들도 있었는데 모두 강릉에 대한 깊은 애정과 지식을 갖고 있었다.
명소를 추천해주시거나 이동하는 장소에 대한 유래와 전설을 이야기해주시는 등 택시를 탈 때마다 매번 새로운 가이드를 만나는 느낌이었다.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있는 기간이어서 유달리 평소보다 친절하셨을 수도 있지만, 늘 따뜻한 마음을 안고 택시에서 내릴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회 한 점에 맥주 한 모금.
창 밖에서는 파도 치는 소리가 들렸고 이따금씩 불꽃놀이 폭죽이 터지는 소리도 들렸다.
강릉에서의 첫날 밤이 그렇게 저물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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